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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해황인물

창원황씨(昌原黃氏)는 본관을 같이 하면서도 계보를 달리하는 3파가 있다. 이른바 <토황(土黃)>이라하여 고려조에서 문하시중을 지낸 황충준(黃忠俊)을 시조로 하고, 그의 후손 황신(黃信)을 1세조로하는 시중공파(侍中公派)와 공희공(恭僖公) 황석기(黃石奇)를 시조로 하고 <당황(唐黃)>이라 일컬어지는 공희공파(恭僖公派), 그리고 고려조에서 호장을 지낸 황양충(黃亮沖)을 시조로 하는 호장공파(戶長公派)가 그것이다. 이들 3파간의 상호 관계에 대해서는 아직 뚜렷하게 밝혀진 것이 없으며 따라서 족보도 따로따로 편찬하고 있는 실정이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원나라에서 귀화한 것으로 알려진 까닭에 <당황>이라 불리는 공희공파의 시조 황석기가 원래 우리나라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종래에는 그가 원나라 사람으로서 고려 공민왕때 노국공주를 배행하고 고려에 온 것으로 전해져 왔었으나 이미 그보다 20년 전에 고려에서 여러 벼슬을 지내고 조적의 난을 토평하는 등 크게 활약한 사실이 <고려사(高麗史)>에 뚜렷이 기록되어 있어 원래 원나라 사람이 아니었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창원황씨는 조선조에서 문과 급제자 78명, 공신 2명, 상신1명을 3파에서 고루 배출했다. 시중공파에서는 황재(黃梓), 황인검(黃仁儉), 황인점(黃仁點) 3부자가 유명하다.

황재는 숙종때 문과에 급제, 영조 때 진주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뒤에 다시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 기행문인 <갑인연행록(甲寅燕行錄)>, <경오연행록(庚午燕行錄)>을 편술했다. 그의 큰아들 정효공(貞孝公) 황인검은 영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판서에 이르렀고, 둘째 아들 황인점은 영조의 딸 화유옹주와 결혼하여 창성위가 되었다.
호장공파에서는 황사우(黃士祐), 황응규(黃應奎), 황섬(黃暹)의 3대가 두드러진다.

용헌 황사우는 중종 때 문과에 급제, 우찬성에 이르렀으며, 그의 아들 송간(松澗) 황응규는 우찬성 황사우의 아들이며, 주세붕(周世鵬),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초서를 잘 썼으며 543년(중종38) 사마시에 합격, 성균관에 입학하여 수차 과거에 응시했으나 실패, 후에 성균관의 천거로 전한사별제가 도어 장흥고 직장을 지낸 뒤 1569년(선조2) 52세로 알성문과에 급제, 여러 벼슬을 역임했다. 1588년 고향에 은거, 1592년(선조25) 임진왜란 때 많은 양곡을 군량으로 바쳐 그 공으로 절충장군에 오르고, 1594년 동지돈령부사가 되었으며 향병대장으로 추대되어 장정·군량 등을 모집하여 출전을 준비중 병사했다.

응규의 아들 정익공(貞翼公) 황섬은 정탁(鄭琢)의 문인이며 영의정 류영경(柳永慶)의 처남으로 선조 때 문과에 급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모윤사가 되어 많은 공을 세우고 대사헌에 이르렀으나 계축옥사 이후 낙향, 학문에만 전념했다.
공희공파에서는 시조 석기의 아들 공정공(恭靖公) 황상(黃裳)은 충혜왕 때 호군이 되고 공민왕 초에 민직부사에 올라 추충익찬공신의 호를 받았다. 1354년(공민왕3) 중국에 가서 장사성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우고 지추밀원사가 되었으며 1356년 기철(奇轍)일파를 숙청하는데 공을 세워 찬추밀원사에 올라 1등공신이 되었다.

1362년 홍건적의 침입 때 왕을 호종, 교조강릉도 도만호가 되어 안우(安祐)와 함께 서울을 수복, 찬성사 상의에 호성수복 1등공신이 되고, 지문하성사에 승진, 추충분의익찬공신이 되었다. 이어 문하찬성사를 지내다 회성부원군에 봉해졌고, 1364년 동북면 도순토사로 덕흥군 혜를 왕으로 추대하고 원나라에서 침입해온 최유(崔濡)를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무찔렀다. 이듬해 홍건적의 침입을 격퇴한 공으로 원나라로부터 봉훈대부 경정감승을 받고 다시 문하찬성사가 되어 추충분의보리익찬공신이 되었고, 1377년(우왕3) 의창군으로 서강도원수가 되어 왜구 방어에 공을 세웠다. 무예와 용맹이 탁월했으며 특히 궁술로 이름을 떨쳤다. 이어 문하찬성사·서강도원수 등을 지냈으며 명궁으로도 이름이 높아 원나라 순제도 그의 궁술을 관람했다고 한다.
석기의 현손인 장무공(莊武公) 황형(黃衡)은 성종 때 무과에 급제, 중종때 평안·함경도 병마절도사로서 변방 야인의 반란을 토평하는 등 많은 무공을 세우고 공조찬서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 황기(黃琦)는 중종 때 문과에 급제, 대사간 등을 지냈으나 권신 김안로(金安老)에게 아부하지 않아 길주목사로 좌천되었다가 뒤에 경기도 관찰사를 지냈다.

부자가 함께 당대의 명신이었다. 문민공(文敏公) 황신(黃愼)은 정랑 황대수의 아들이며 이이(李珥)의 문인이다. 1588년(선조21) 알성문과에 장원, 여러 관직을 거쳐 1589년 정언으로서 정여립(鄭汝立)의 옥사에 관해 대신들의 직언하지 않음을 논박하다가 고산현감으로 좌천되었다. 1591년 전저의 문제에 관련, 파직되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때 기용, 지평으로 명나라 송경략을 접반하고 세자(광해군)를 따라 남하 제찰사의 종사관을 지냈다. 1596년 절충장군으로서 적영에 다녀온 뒤 통신사가 되어 명사를 따라 일본에 왕래, 화의가 결렬된 뒤 조정으로 하여금 명나라의 내원을 청하게 하여 가선대부에 올랐고, 그 뒤에 위유사·찬획사·전라도 관찰사 등으로 왜란에 공이 많아 1597년 동지중추부사가 되었고, 이듬해 공조·호조의 참판, 이어 한성부 우윤·대사간을 역임했다.

1601년 대사헌으로 문경호(文景虎)에게 지탄받는 스승 성혼(成渾)을 변호하다가 파면되었다. 1602년 사신으로 명나라에 간 사이에 또 앞서의 사건으로 대사헌 정인홍(鄭仁弘)에게 탄핵을 받고 삭직되었다. 임진왜란 때의 공훈으로 복관이 결정되었으나 상신 류영경(柳永慶)이 시행하지 않아 낙향했다. 1610년(광해군2) 호조참판으로 진주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공조판서를 거쳐 호조판서를 지내고, 임진왜란때 광해군을 시종한 공으로 위성공신 2 등에 회원부원군에 봉해졌다.

1613년 계축옥사에 이이첨(李爾瞻)의 사주를 받은 죄수 정협(鄭浹)의 무고로 웅진에 유배되어 배소에서 죽었다.
인조초에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공주의 창강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추포집(秋浦集)>, <일본왕환일기(日本往還日記)> 이 있다. 뒤에 호조판서에 이르렀으며 위성공신으로 회원부원군에 봉해졌다. 재정에 밝고 문장에도 뛰어났다.

황신의 후손에서 병자호란 때 청나라 태종의 암살 계획을 추진했던 충렬공(忠烈公) 황일호(黃一晧), 정조 때 학자이며 서예가로 이름났던 황운조(黃運祚)등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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