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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덕현(읍내동(邑內洞))

◎ 회덕현(읍내동)의 입지와 자연환경

    읍내동은 동쪽으로는 계족산, 서쪽은 갑천, 남쪽은 법동과 대화동, 북쪽은 신대동과 연축동과 인접해있는 동(洞)이다. 읍내동은 계족산 서쪽 끝과 당산 동쪽 사이의 잘 발달된 평지에 들과 회덕현의 관아와 부속시설 있는 곳이라서 마을 이름도 회덕현의 소재지라는 뜻으로 읍내(邑內)라 하였다.

    읍내동은 회덕현 소재지였기 때문에 많은 역사와 문화유적이 산재해 있다. 현재 회덕파출소 뒤쪽으로 조금 떨어진 야산 기슭에 향나무, 느티나무가 서있는데 이곳이 바로 회덕현감이 업무를 보던 동헌(東軒)터이다. 동헌터에서 남쪽으로 회덕 1동사무소가 있는데 이곳이 회덕현의 무관들의 집무처인 장청터이고, 다시 남쪽으로 200m정도 내려가면 회덕초등학교가 나타나는데 이곳은 회덕의 환곡을 보관하던 사창(社倉)터이다. 또한 큰길의 좌측편 당아래로 통하는 길목이 객사터이고, 객사터에서 100m정도 떨어진 신협 뒤쪽의 주택가가 죄수를 가두었던 옥터이다. 문화유적으로는 읍내의 동쪽에 자리한 뒷골에 제월당과 옥오재가 있고, 계족산 봉황정을 오르는 산중골에 용화사가 위치해 있는데, 용화사 경내에 석불입상이 봉안되어 있다. 또한 효자골에는 회덕향교가 있으며 동사무소 마당에는 관아 앞에 세워져 있었던 15기의 선정비와 불망비가 있다. 그리고 동사무소 뒤편에는 순조 때의 암행어사 홍원모의 공덕을 기리는 영세불망비와 비각이 있고, 뒷골과 당아래 마을에는 장승들이 수호신으로 마을을 지키고 있다.

    ◎ 회덕현(읍내동)의 연혁

    읍내동 지역은 백제 때는 우술군(오천)이었다가, 신라시대에는 비풍군으로 개명하였고 그 밑에 유성현과 적오현(뒤에 덕진현)을 그 속현으로 두었다., 고려초기에는 회덕현으로 읍호를 바꾸었고, 이후 고려 현종 9년(1018) 이후에는 공주의 속현으로 귀속되었다. 그런데 고려시대에 유성현과 덕진현이 공주의 속현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 현종 9년 군·현의 개편시에 유성현과 덕진현이 회덕의 속현에서 벗어나 공주의 속현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후 회덕현은 고려 명종 2년(1172)에 처음으로 감무(조선시대의 현감과 같음)를 두게되어 주현으로 승격하게 되었다.

    조선초기 태종 13년(1413)에 전국을 8도제로 개편하면서 행정구역을 서울→도→ 주·부·군·현→면(방·사)→리(동·촌)의 체제로 편성하였다. 이에 따라 회덕은 충청우도 공주목에 속하는 종6품의 현감이 다스리는 회덕현이 되었다. 이와 같이 8도제의 실시와 더불어 소현의 병합이 이루어졌는데 이때 유성현이 폐지되면서 그 영역이 회덕현과 진잠현에 속하게 되었다.


    ◎ 읍내동의 전통마을과 씨족

    ○ 당아래(당하리) : 당아래는 당산에서 동쪽, 읍내 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즉 읍내동 뒷골에서 신탄진 방면의 도로를 건너면 맞은 편에 자리잡은 마을로 당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당아래라 부른다. 당산은 읍내에서 서쪽 법성사 쪽으로 갑천에 연해있는 산인데 동쪽으로는 계족산을 마주 보고 있는 산이다. 옛날에는 이 산의 꼭대기에 마을의 당집(산제당)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지금은 흔적도 없다. 그리고 당아래에 속한 자연마을로 배미골이 있다. 그 이름은 배바위가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배비골이라 하였다. 옛날에는 갑천의 물줄기가 이 배바위 아래까지 흘렀으며, 물이 깊어서 이곳까지 배가 드나들었다 하며 그때 이 바위에 배를 매어두었기 때문에 배바위라고 부른다. 이는 {회덕읍지}에 우암 송시열 선생이 썼다는 '선암(船岩)' 즉 배바위란 글씨가 남아 있었다고 기록된 사실로도 확인할 수 있다. 당아래 마을에는 송촌에서 분촌되어 나온 은진송씨 7∼8호 정도 세거하였는데 이곳의 은진송씨들은 은진송씨 제월당파 문희공 자손들이 거주하였다.

    ○ 뒷골(후곡) : 뒷골은 잿들에서 동쪽, 산중골에서 서쪽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읍내 뒤의 골짜기에 마을이 있다 하여 뒷골마을 또는 뒷골이라 불렀는데 이를 한자식 표기로 후곡(後谷)이라 하기도 하였다. 옛날에는 잿들·뒷골·숨골·산중골이 모두 한 동네였다고 한다. 뒷골에 은진송씨는 약 60호 정도 살았다. 경부선 철도 아래쪽에는 제월당의 작은집 순흥군의 후손들이 세거하였기에 이곳을 순흥댁이라 하였고, 제월당 종가는 제월당 7대 종손이었던 송헌조가 임실현감을 지내서 임실댁이라고 하였다. 현재의 영진아파트 자리에 강서댁이 있었는데 이곳이 순흥공 종가댁이다. 계족산 올라가는 쪽 완계댁 옆에는 전승지댁·온전댁이 거주하였다. 그 외 성씨로는 단양우씨 3∼4호 정도가 거주하였다. 옛날 이 마을에는 송씨가 가장 많이 살았으나, 현재는 호구가 늘어나 각성받이다.

    ○ 효자골(효잣골, 향교말, 효자동, 교동) : 효자골은 읍내에서 북서쪽, 지금의 대한통운마트 뒤편에 있는 마을이다. 회덕향교가 효자골에서 바로 북쪽에 있어 향교마을·향교말·교동이라고 부르며 이 마을에 효자가 많이 살았다하여 효자골이라고도 한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송참봉댁 하인 운경이 홀어머니를 극진히 모셨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삼년 시묘 끝에 자신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전한다. 또한 일설에 이곳은 향교의 전답을 소작하던 소작인들이 모여 살아 소작골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예전에는 전체 약 30호가 거주하였으며 이 가운데 은진송씨가 2∼3호 정도인데 여기에 살던 은진송씨는 제월당의 작은집파로 효자동 참봉댁이라 하였다. 풍천임씨가 3∼4호 정도 살았고, 그 외 성씨는 각성받이이었다. 지금도 이곳에 향교가 위치하고 있다.

    ○ 읍내(邑內, 원읍내) : 읍내는 동사무소를 중심으로 현의 소재지가 원읍내이다. 이 곳이 옛날에는 이곳에 관아와 객사 그리고 관아의 부속건물인 사창·옥·장청이 있던 회덕 읍내의 중심지였기에 이를 원읍내라 부르는데 지금은 읍내라고 한다. 원읍내는 약 50∼60호가 집촌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 가운데에는 은진송씨와 풍천임씨가 많았으나, 장이 서던 곳이라서 각성받이들이 많이 살았다.

  ◎ 읍내동의 세거성씨

    ○ 회덕황씨(懷德黃氏) : 황씨의 원조는 황락이라 하나 중간의 세계는 실전되어 알 수 없고, 회덕을 본관으로 하는 회덕황씨는 고려말의 인물인 회천군 황윤보를 그 시조로 삼는다. 이들 회덕황씨는 황윤보로 부터 이곳에 세거하여 오늘날까지 회덕을 본관으로 한 유일한 토성이 되었다. 황윤보의 아들 황연기는 회덕에 전래되어 오던 미륵원을 재건하여 이곳을 지나는 행려에게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기를 죽을 때까지 하였다. 미륵원은 고려 우왕 7년(1381)에 중수하고, 미륵원의 남쪽에 남루를 건립한 후 당시 중앙정계의 중진급 인물들에게 기문을 청하였다. 당시 기문을 작성한 사람은 이색·조선의 개국공신 하륜·조박·이직·변계량·안순 등이다. 이는 회덕황씨의 고려말·조선초의 위상을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조선초기 회덕황씨로 중앙정계에서 활약한 인물은 황자후이다. 그는 고려말·조선초의 혼란기에 향리에 은거했던 아버지 황수와는 달리 출사하여 저명한 관리가 되었다. 황자후는 호패법의 시행과 동전의 사용을 주장하였고, 1425년 침구 전문업의 설치를 주장했으며, 1427년(세종 9) 9월에는 {향약구급방}을 인쇄하여 외방에 나눠 줄 것을 청하여 충청도에서 간행토록 하였던 인물로 중앙정계에서 크게 활약한 인물이다. 그의 아들 황유는 태종의 부마가 되었고, 황유의 자손 대에도 관료의 진출이 꾸준히 이루어져 회덕황씨 가문의 위세는 잘 유지되었다. 그러나 세종 초에 황유의 아들 황호가 금성대군과 결합하여, 왕권을 찬탈한 세조를 공격하려다가 발각되어 피화 된 사건이 있었고, 특히 광해군 때에 황덕수가 폐모론에 긍정적으로 깊게 참여하였다가 인조반정으로 이 일이 문죄 되면서 가문의 세는 크게 위축되었다.

    회덕의 최대 성씨이었던 은진송씨가 회덕에 입향하게 된 계기도 은진송씨 회덕 입향조 송명의가 회천군 황윤보의 손자인 황수의 사위가 된 것이 인연이 되었다. 현재 회덕황씨의 대표적인 유적지는 회덕 관동(동구 마산동)이며, 읍내동에 집성촌이 있었다. 특히 동구 마산동에는 시조 황윤보 및 그 후손들의 묘와 함께 그들의 후덕지사를 보여주는 미륵원 남루가 편액들과 함께 전해지고 있다.

◎ 읍내동의 옛 지명

    ● 객사터 [터] : 회덕초등학교와 뒷골굴 사이에 회덕현 객사가 있던 자리를 객사터라 부른다. 객사는 회덕 관아에 일을 보러온 사람들이나 사신들이 묵던 숙소이다.
    ● 계족산 [산] : 읍내에서 동북쪽에 위치한 산으로 산의 지형이 닭의 발과 같이 생겼다하여 계족산이라 부른다. 닭이 울면 희망이 오듯이 전설에 산이 울면 비가 온다고 하며 비풍군의 옛 이름도 비(比)는 비(雨)로 통한 듯 싶다.
    ● 당산 [산] : 읍내에서 서쪽에 위치한 산으로 옛날에는 이 산에 당이 있어 당산이라 부른다. 지금은 흔적도 없다.
    ● 당아래(당하리) [마을] : 당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당아래라 부른다.
    ● 동헌터 [터] : 객사터에서 북쪽, 회덕파출소 동쪽으로 산기슭에 있다. 회덕현감이 업무를 보던 곳으로 현재는 터만이 남아있으나 이곳이 유서 깊은 현청 고을임을 말해주듯 오래된 느티나무와 향나무가 동헌터를 지키고 있다.
    ● 뒷골(후곡) [마을] : 잿들에서 동쪽, 산중골의 남쪽에 있다. 읍내 뒤(읍내에서 동쪽)의 골짜기에 마을이 있어서 이를 뒷골마을 또는 뒷골이라 부르며 한자표기로는 후곡(後谷)이라 하였다.
    ● 뒷골굴(후곡수도) [굴] : 잿들과 읍내 사이에 있는 경부선 철로 밑의 굴다리로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복선공사로 철로를 이설하였으나 굴다리는 철거하지 않아 그대로 남아있어 주민들은 이 굴로 통행하고 있다.
    ● 배바위(선암) [바위] : 당산에서 서쪽의 갑천변에 있다. 옛날에 이곳은 물이 깊어 배가 이곳까지 드나들었다고 하는데 배를 이 바위에다 매었다하여 배바위라 부른다. 배바위에는 우암 송시열이 선암(船岩)이라고 쓴 바위가 얼마 전까지 전해져 왔는데 도로공사로 없어졌다.
    ● 배바위모퉁이 [모롱이] : 배바위가 있는 부근에 모퉁이가 있으므로 이를 배바위 모퉁이라 부른다.
    ● 배배골(배바위골)) [골] : 배바위가 있는 골짜기로서, 당산 너머 서쪽이 된다. 배바위가 있는 골짜기라서 배바위골이라고 부르며 또 이것이 변하여 배배골 이라고도 한다.
    ● 법성사 [사찰] : 효자골에 있다.
    ● 봉은암 [사찰] : 계족산에서 서쪽, 승골마을에서 동쪽에 있다. 봉은암은 동춘 송준길이 건립한 것이라 하는데, 뒤에 승려의 암자로 변했다. 현재는 이 암자를 봉운암이라고 부른다.
    ● 사지고개(사직고개) [고개] : 대전에서 신탄진으로 이어지는 길로 고속도로와 국도가 나란히 놓여있는 지점이다. 이 고개에 회덕현 사직단이 있어 사직고개라 하였는데 이것이 변하여 사지고개가 되었다. 또한 이곳은 험한 고개로 산적들이 많아 이 고개를 넘다가 잡히면 물건을 빼앗고 사람의 사지를 틀어 나무에 매달아 죽였다 하여 사지고개라 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근래에 만들어져 전해지고 있다.
    ● 산제당 [제당] : 뒷골과 계족산 정상 중간에 있으며, 뒷골주민들은 매년 음력 시월 초사흗날이 되면 이곳에서 마을의 안녕을 위한 산신제를 지내 오고 있다.
    ● 효자골 (향교말, 효자동, 교동, 소작골) [마을] : 읍내에서 북서쪽, 현 대한통운 마트 뒤편에 있는 마을이다. 향교가 효자골에서 바로 북쪽에 있기에 이곳을 향교마을, 향교말, 교동이라고 부른다. 또 이 마을에는 효자가 많아 효자골이라 하였고, 향교운영에 필요한 전답을 소작하는 소작인이 많이 살고있어 소작골이라고도 하였다.
    ● 승골(승곡) [골] : 회덕정수장의 남쪽, 사직고개에서 동쪽에 있다. 이 골짜기에서 계족산 정상 쪽으로 봉은암이 있고, 중이 사는 골짜기라 하여 승골이라 부른다. 또한 승골 내에 마을이 있어 승골마을·승골·승곡이라고 한다.
    ● 아들바위 [바위] : 계족산에서 남서쪽, 용화사에서 동북쪽에 있다. 옛날부터 사람들은 이 바위 위에 돌을 던져 떨어뜨리지 않으면 아들을 나고, 돌이 바위 아래로 떨어지면 딸을 낳는다고 하여 아들바위라 부른다.
    ● 아리랑고개 [고개] : 잿들에 위치한 고개로 읍내동 현대아파트와 영진아파트 사이에 있는 고개를 말한다.
    ● 옥터 [터] : 회덕현의 옥으로 당산과 한국특수메탈 사이가 된다.
    ● 용화사 [사찰] : 계족산 서남쪽으로 아들바위와 산제당 사이가 된다. 이 절은 1934년에 창건되었는데 시 문화재로 지정된 석불입상이 경내에 봉안되어 있다.
    ● 읍내(원읍내) [마을] : 동사무소를 중심으로 읍내동의 소재지가 원 읍내인데 옛날에 읍내리의 중심지였기에 원읍내라 부르며 읍내동의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이다.
    ● 읍내방죽(뒷골방죽) [못] : 뒷골마을과 용화사 사이에 있다. 읍내소재지에 있기에 읍내방죽이라 부르며 또 뒷골에 있기 때문에 뒷골방죽이라고도 부른다.
    ● 장군바위 [바위] : 당산의 서쪽 바로 아래에 있다. 이곳에 장군대좌의 명당이 있으며 바위가 크다해서 이를 장군바위라 부른다. 옛날에 계족산 장군과 계룡산 장군이 싸우기 위해 이곳에서 만났는데, 늦게 온 계룡산 장군이 화가 나서 바위를 주먹으로 쳤다는데 그 모양이 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고 하며, 바위에 사람 궁둥이 자국이 있는데 장군이 앉았던 자리라고 한다.
    ● 장청터 [터] : 지금의 회덕1동사무소가 장청이 있던 자리이다. 장청이란 회덕 현에 소속된 무관이 근무하던 관청이다.
    ● 잿들 [들] : 산중골과 읍내사이, 현대아파트와 영진아파트 사이를 말한다. 이 고개가 지형 상 평평하여 들과 같아 이를 잿들이라 부른다. 옛날에는 몇 가구가 거주하고 있었으나 현재는 아파트와 마을이 크게 형성되고 있다.
    ● 조산(造山) [산] : 당산과 배배골 사이에 있다. 당산의 남쪽에 있는 이 산은 모양이 조그만 하기 때문에 마치 만든 것 같다하여 이를 조산이라 부른다.
    ● 참새골(참사골) [골] : 뒷골마을과 흔디절 사이로 이 골짜기에 참새가 많아 참새골이라 부르며 또 참사골이라고도 한다. 현재는 몇 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 창터 [터] : 객사 터 근처로 옛날 회덕현의 창고가 있던 터를 창터라 부른다.
    ● 향교골 [골] : 향교가 있는 골짜기로 이 골짜기 위에 향교가 있어 향교골이라 한다.
    ● 호랑이굴 [굴] : 배바위 부근에 있는 굴로 옛날에 이곳에서 호랑이가 살았다고 하여 호랑이굴이라 부른다.
    ● 혼디골(혼디절) [골] : 승골과 뒷골 중간, 계족산과 경부고속도로 사이를 말한다 있다. 지금은 없지만 옛날에 이 골짜기에 절이 있었는데 이 절이 매우 가난해서 혼디절이라 불렀다. 또 혼디절이 있는 골짜기라 하여 혼디골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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