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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해황인물

시조 황경(黃瓊)은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사위로 벼슬이 시중에 이르렀다. 그러나 후에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명종 때 전중감으로 권신 이의방(李義方)이 모해하려 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장수로 돌아왔다가 남원으로 이주하여 세거한 황공유(黃公有), 태학생으로 학문이 뛰어나 《동국명현록(東國名賢錄)》에 기록된 일재(逸齋) 황감평(黃鑑平)등이 선대에 있었으나 계대가 불가능하므로 이조참의에 증직된 황석부(黃石富)를 1세조로 하고 선대의 요람지요 세거지인 장수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장수황씨는 조선조에서 문과 급제자 40명, 상신2명, 대제학2명, 호당2명, 청백리 1명, 공신6명을 배출하였으며 조선 4대 명상의 한사람으로 꼽히는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정승을 낳아 더욱 유명하다. 그는 판강릉부사 황군서의 아들이다. 고려말 1389년(창왕1) 문과에 급제, 성균관 학관이 되었다.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들어가 은거했으나 조선 태조의 간청으로 1394년 성균관 학관으로 세자우정자를 겸임, 여러 관직을 거쳐 1404년(태종4) 우사간대부가 되었다가 이듬해 지신사에 올랐으며, 태종의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1408년 민무휼(閔無恤)등 왕의 처족이 횡포를 부리자 이를 제거했고, 형조, 병조,예조, 이조, 호조의 판서를 역임, 1416년(태종16) 이조판서로서 세자 양녕대군의 폐출을 반대하다가 공조판서로 전임되었다. 이어 판한성부사가 되었으나 1418년 세자가 폐출되고 충녕대군(세종)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를 반대하여 서인이 되어 교하로 유배, 이어 남원에 위배되었다. 1422년(세종4) 풀려나와 1427년 좌의정에 오르고 세자사부를 겸했다. 1430년 투옥된 태석균(太石鈞)의 감형을 사사로이 사헌부에 부탁한 일로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이듬해 복즉, 영의정에 올라 이후 1449년 치사할 때까지 18년간을 영의정에 재임하면서 농사의 개량, 예법의 개정, 천첩소생의 천역면제 등 훌륭한 업적을 남겨 세조의 가장 신임받는 재상으로 왕을 보좌했다. 그는 정승의 자리에 24년, 영의정에만 18년 동안 있으면서 많은 치적과 일화를 남겼으며 소신이 굳으면서도 청렴하여 청백리에도 녹선 되었다. 시조 몇 수가 전하며 인품이 원만하고 생활이 청렴한 명상으로 후세의 추앙을 받고 있다. 세종의 묘정에 배향, 파주의 방촌영당, 상주의 옥동서원, 장수의 창계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저서에 《방촌집( 村集)》이 있다.

그의 큰아들 호안공(胡安公) 황치신(黃致身)은 세종때 호조판서, 단종 때 중추원사, 세조 때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셋째아들 열성공(烈成公) 황수신(黃守身)은 세조 원년에 좌익공신에 올라 좌참찬·좌찬성을 지내고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문정공(文貞公) 황정욱(黃廷彧)은 희(喜)의 후손으로 부원군 열(悅)의 아들이다. 그는 1558년(명종13) 문과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고, 당시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부친이 이인임(李仁任)이라고 명나라에 잘못 기재된 것을 여러 차례 진정하다가 승지에 올라 종계변무 주청사로 명나라에 가서 정정시켰다. 이어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 1등이 되어 장계부원군에 봉해지고 예조를 거쳐 병조판서에 전임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소사가 되어 왕자 순화군 보를 배종하여 강원도에 들어가 의병을 모집하는 격문을 8도에 돌렸으며 왜군의 진격으로 회령에 들어갔다가 모반자 국경인(國景仁)에 의해 임해군·순화군 두왕자와 함께 잡혀 왜장 가토로부터 선조에 항복권유를 쓰라는 강압을 받고 거부했으나 두 왕자와 그의 손자를 죽이겠다는 위협을 받고 아들 혁이 대신 썼다. 그는 선조때 광국공신에 오르고 대제학이 되었다. 이에 그 항복을 권유하는 내용이 거짓임을 밝힌 또 한 장의 글을 썼으나 이를 입수한 제찰사가 묵살함으로써 석방된 뒤에 동인들의 탄핵을 받고 유배되었다. 1597년 풀려났고, 죽은 뒤에 신원되었다. 문장·시·서예에 능했으며, 저서에 《지천집(芝川集)》이 있다.

또 한 사람의 대제학인 문경공(文景公) 황경원(黃景源)은 정욱의 8대손이며 기(璣)의 아들이다. 그는 이재(李縡)의 문인으로 영조 때 문과에 급제, 대제학·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삼례(예기·주례·의예)에 정통하고 특히 고문에 밝았으며 서예에도 뛰어났다.
황맹헌(黃孟獻)·황여헌(黃汝獻)·황효헌(黃孝獻) 3형제도 유명하다. 그들은 부사 관(瓘)의 아들로 맏이인 소양공(昭襄公) 황맹헌은 중종반정에 공을 세워 정국공신에 오르고 벼슬은 한성판윤에 이르렀다. 둘째인 유촌(柳村) 황여헌은 중종 때 문과에 급제, 호당에 뽑히고 전적을 지냈다. 문장·서예에도 뛰어나서 <죽지사(竹枝詞)>라는 그의 시문은 명나라에서까지 격찬을 받았다. 셋째인 축옹(蓄翁) 황효헌은 중종 때 문과에 급제, 호당에 뽑히고 이조참판·안동부사 등을 지냈다.
문장에도 뛰어나 이행(李荇)등과 함께 《신동국여지승람(新東國輿地勝覽)》을 편찬하였다.

이밖에 선조 때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내침이 있을 것을 예고했던 우송당(友松堂) 황윤길(黃允吉), 임진왜란 때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많은 전공을 세우고 진주성 방어전에서 전사한 무민공(武愍公) 황진(黃進), 숙종때 학자로서 지리에 정통하여 《여지도(輿地圖)》를 만들고,《지도연의(地圖衍義)》를 저술한 황엽(黃曄), 한말의 야사를 엮은 《매천야록(梅泉野錄)》의 저자 황현(黃玹)등이 유명하다.

  黃門家 http://www.hwang.or.kr 이메일: hwangtot@naver.com 홈지기: 황병극(黃秉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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