序文 1729 도제

跋文 1729 재징

序文 1804 송환기

序文 1832 송치규

序文 1856 기정진

序文 1891 송병순

序文 1919 선모

 序文 1936 이중명

序文 1956 재규

 序文 1969 순택

 

 

 우주황 인명록

족보란 그 계통을 밝히고 그 일가를 걷우는 것이다. 계통을 밝히지 않으면 그 본원을 저 버리는 것이요, 일가를 걷우지 않으면 그 골육을 소홀히 하는 것이다. 대범 씨족이 대를 갈아가며 족보를 걷우는 일은 또한 아름답지 아니한가? 우주황씨는 남녘의 세족이다. 족보를 이미 병진년에 세 번째로 간행하고 다시 증수하니 30여년동안 일가의 가지가 심히 번창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참으로 착한 일을 쌓은 나머지가 아니면 그럴 일이 있을 것인저! 대개 그 선계는 고려때에 중윤공 휘 민보로부터 비롯되어 9세를 거쳐 문숙공 휘거중에 이르러는 우리 조정의 개국원훈이 되었다. 겸하여 문숙공은 이단을 물리치고 바른 도를 세운 공이있다. 고려말에 불교가 심히 성하여 자뭇 집집마다 염불을 외우는데 공은 분연히 전주에서 일어나 성조를 도와 태평을 이루고 여러 고을에 교수훈도를 두자고 맨먼저 주장 했을 뿐 아니라 도학을 일으키고 풍속을 바로 세우기를 급한 일로 여겨 이교를 함부로 굴지 못하도록 하게 하여 창립의 기본을 세워 은혜를 내세에까지 아름답게 끼치고, 후손들에게 넉넉함을 드리웠으니 이 또한 다함이 없는 일이었다. 이로부터 그 자손들은 번창하고 음조가 끊이지 않아 울연히 대대로 벼슬 집안이 되었다. 좌상공 휘헌은 명종때에 윤형원의 모함을 받아 전리로 물러났다가 뒤에 원통함이 풀어져 다시 정승이 되는 기회가 잇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상과 같은 사실이 모두 황씨의 상계에 관한 실적이다. 중엽 이후에 가풍은 더욱 명절과 문학으로 두터워졌다. 예컨데 동계 휘 극효, 병사 휘 박, 효자 휘 극형등은 정충성효로 이름이 나있고 죽유 휘 자후, 일심재 휘 인. 구암 휘 이정, 정재 휘 석진등은 모두 깊은 학문과 독실한 행실로 드러나 있으니 문숙공께서 넉넉함을 드리운 음조가의 덕이 내려온 것이 아니며 착한 일을 쌓은 갚음이 아직 다하지 않았음이 아니랴? 어허 이 또한 성한 일이로다. 정재의 아들 학연이 새로이 족보를 꾸미고 나서 나에게 서문을 청해왔다. 그 족보일을 주장한 분은 참판 노수씨인데 당세에 훌륭한 선비를 젖히고 모자라고 졸렬한 글을 받고자 함은 무엇 때문인고? 돌아 보건데 선대로부터 우의가 두텁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옛 서문을 살피건데 족조이신 심재 문경공께서는 "문학의 성함과 절행의 두터움이 끊기지 않고 또 한가문이 서로 이어져 내려와 오래도록 빛남이 있다. 순연하여 무리가 나누어 지거나 다른 뜻을 지닌 사람이 없는 것은 진실로 그 비할 때가 없으니 지극히 그 성문에 잠긴 아름다운을 발휘한 것이다"라 하셨고 또 정자와 소씨가 가르침을 인용하여 그 충의와 효제에 힘쓰라는 말씀까지 갖추셨다. 그러니 이 재주없는 사람이 다시 어떤 군말을 붙히리요. 오직 이 족보에 든 모든 이들은 심옹께서 힘써나가라고 하신 뜻을 그대로 지켜 선대에서 지녔던 화목했던 가풍을 막힘없이 행한다면 문호가 더욱 커지고 번창할 조짐을 이루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우주 황씨의 빛난 이름이 반드시 강하, 곡성에 손색됨이 없다 할 것이다.

 

          신묘년(1891년) 음8월상순  은진 송병순 삼가 씀